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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4일 화요일

1/ WHAT_01_전제된 주체성_ AI 시대의 주체성 문제, 불교가 답하다 [불교평론]

  

이 글을 쓴 것은 누구인가?


- AI 시대의 주체성 문제, 불교가 답하다


1. 들어가며

어느 문득, 내가 글이 정말 글인지 묻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문장 하나를 AI에게 다듬어 달라고 했을 뿐인데, 돌아온 문장이 내가 것보다 낫다. 그래서 이번엔 문단을 맡긴다. 그리고 다음엔 초고 전체를 넘긴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저자가 아니라 편집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마침내 묻게 된다. 글을 것은 누구인가?

질문은 오늘날 법조계와 출판계, 학계를 가로질러 창작의 주체를 묻게 하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AI 생성했거나 참여한 창작물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인간이 프롬프트를 설계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글을 것은 알고리즘인데, 알고리즘을 작동시킨 의도는 인간의 것이다. 주체는 나뉘어 있고, 경계는 흐릿하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스스로 행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1]

스펙트럼은 창작의 영역을 넘어서도 펼쳐진다. 비대면 컴퓨터 A/S에서 원격 조종은 타인이 화면을 보며 조언하는 단계이다. 자율 주행은 권한을 위임한 시간 동안 AI 운전대를 대신 움직이는 단계이다. 자율 AI 에이전트는 조종자조차 사라진 단계이다. 마우스가 혼자 움직이고 파일을 열어 이메일을 쓰거나 전화까지 개통한다. 단계마다 행위의 주체는 조금씩 에게서 멀어진다.[2]

이러한 위임의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편리함이나 효율성을 이유로 스스로 조금씩 넘겨준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어디에서부터 행위가 아닌가?[3]

AI 앞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당혹감은 일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위기감이나 저작권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심층에는행위 주체성(agency)’ 상실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다. ‘라는 주체는 무엇인가? 주체의 범주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가? 그리고 주체성은 위임되는 것인가 아니면 범주가 변하는 것인가?

불교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뤄온 전통이다. 글은 AI 시대의 주체성 논쟁을 불교의 언어로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과학과 불교가 주체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검토한 , 무아(無我) 연기(緣起) 논리가 시대의 윤리에 대한 물음에 어떻게 응답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주체성은 환영인가? - 무아를 마주한 과학

라는감각 너무나도 자명하게 느껴진다. 숨을 쉬고, 글을 읽는 것이라는사실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나의 경계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생각보다 훨씬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과학이 직접 마주한 문제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출발점은 생명 자체의 정의이다. 보통살아있는존재로, 살아있다는 것을 분명한 사실로 전제한다. 그런데살아있는 ’,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과학은 아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생명의 정의는 생명을 정의하려는 사람의 수만큼 많다고도 한다.[4] 이는 물질 시스템이 가진 특성의 총합, 질서로부터 질서를 산출하는 메커니즘, 또는 유전정보의 복제 과정으로도 정의된다.[5] ‘라는 주체의 범주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있다. 게다가 이러한 정의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생명을 가리키고 있으며, 어느 것도라는 감각을 설명하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대사하거나 번식하지 못하고 숙주 세포를 빌려야만 증식한다.[6] 프리온은 DNA RNA 없이 단백질만으로 비정상적구조를 스스로 복제한다.[6] 이처럼 전통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자기복제는 생명의 기준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식물의 세계로 가도 경계는 흐릿하다.

미국 유타주의 아스펜 숲은 지상에서는 수만 그루의 나무인데, 지하에서는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 단일 유전 개체이다. 유전적으로 다른 나무들도 지하 균류 네트워크를 통해 양분과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숲은 개별 나무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정보 교환망(Wood Wide Web)으로 간주된다.[8]

자기조직화 이론(Theory of Self-Organizing Systems) 현상을 확장된 틀에서 설명한다. 개미 군집의 집단 지능이나 모래더미의 임계각 등은 구성 요소들의 상호작용만으로 질서가 출현하는 사례이다.[9] 물론 질서가 출현한다고자기감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감각이 나타나는 곳에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 있다.

정보이론의 관점에서 생명은 정보 저장과 처리이다. 이는 물질적 실재가 정보 단위의 조직에서 발생한다는 사유(It from Bit)[10] 맞닿아 있다. 분자 수준에서 생명체는 정교한 정보 처리 시스템이며, 여기에서자기 독립된 실체가 아닌 정보 처리의 중심일 뿐이다.

이렇듯 생명을 특성이나 움직임으로 시각에서 정보의 패턴으로 시각까지, ‘자기 실체를 찾으러 길에서 과학은 경계가 애초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들을 이해해도 그것이라는감각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이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뇌와 감각이 쉬지 않고 만들어내는라는 일관된 이야기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그것이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뇌는 어떻게 '' 만들어내는가?

뇌가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요 이유는 제한된 용량이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감각을 통해 입력된 경험을 기반으로 의식에 패턴화된 틀이 마련된다. , 의식은 감각을 통한 단순 입출력이 아니라 압축된 허구의 세상을 제시하는 채널이고, 감각되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잘린 장면들의 편집본에 불과하다.[11]

지각 전체가 일종의통제된 환각(controlled hallucination)’이라는 연구에 따르면,[12] 뇌가 만들어낸 가장 안정적인환각 우리는현실이라 부른다. 모든 사람이 현실로 믿는다면 환각이 이상 환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구성 과정은 외부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안에서 올라오는 신호들도 뇌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장이 빠르게 뛰면 뇌는 원인을 추측해서 신체 반응을 무섭다거나 기쁘다는 정서 경험으로 변환한다. 이렇듯 감정이라고 느끼는 것도 뇌의 추측이다.[13]

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면 그것이구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수면 감각 입력이 줄어들면, 뇌는 자체 신호를 증폭시켜 꿈이라는 내부 시뮬레이션을 만든다. 소리를 색깔로 경험하거나 글자를 맛으로 지각하는 공감각 현상은 감각 체계가 고정된 통로가 아님을 보여준다.[14] 종에 따라서 감각 가능한 영역도 다르다.[15] 감각은 세계의 정확한 반영이 아니라 굴절을 일으키는 매질이다.

뇌가 오작동할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있다. 특정 영역이 손상되거나 연결이 끊어지면,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기던라는 주체의 여러 층위가 하나씩 무너지면서 그것이 애초에 만들어진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코타르 증후군 환자들은 인지 기능이 멀쩡한데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잃어서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안의 신호를 처리하는 영역이 손상되면서 내부 경계의 감각 자체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감각 회로가 끊어지면 사라진다. 이인증 환자는 자신을 바깥에서 바라본다고 호소하고, 신체 통합 정체성 장애 환자는 자기 팔다리를 남의 것으로 여겨 절단을 원한다. 신체 경계를 담당하는 영역의 지도에 팔다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16]

, 감정, 생각이라는 감각은, 뇌가 특정 신호들을 자기라는 묶음으로 엮어내는 과정의 산물이다. 묶음이 풀리면 나의 어느 부분이든 낯선 것이 있다. 자아는 뇌가 순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이야기들의 결과이다. 안팎의 감각 신호들을 재료로 하여, 뇌는 이들을 일관된 나로 묶어낸다. 묶음이 유지되는 동안 우리는 자아를 실제로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느낌이지 실체가 아니다.

자아의 실체를 찾고자 과학은 뇌를 열고, 신경을 추적하고, 이들의 결손 사례들을 분석했다. 결과 발견한 것은 자아의 실체가 아니라, 자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거기에 어떤 고정된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2,500여년 불교가 명상의 통찰로 도달한 결론과 놀랍도록 공명한다.

 

3. 자아는 구성된다 - 무아를 말하는 불교

과학이 자아의 실체를 추적하다 그것이 구성되는 과정을 발견했다면, 불교는 구성을 해체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무아(無我) 여타의 종교나 철학과 불교를 구분 짓는 핵심이기에, 이미 방대한 연구가 축적되어왔다. 이러한 논의의 결을 존중하되, 인공지능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상을 고찰하기 위해 전례 없는 해석의 변주를 시도한다. 불교의 개념, 칠식주(七識住), 오온(五蘊), 그리고 연기(緣起) 현대적으로 - 특히 칠식주는 생물학, 오온은 정보이론의 관점에서 - 재조명한다.

물론 발생 맥락과 목적이 전혀 다른 체계들을 구조적으로 비교하는 일에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러나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무아의 심층을 현대 과학의 언어로 번역해 보는 것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의식의 본질을 규명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다소 낯설고 불편할 있는 사유의 도약이 예정되어 있으니, 부디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시기 바란다.’[17].

칠식주: 몸과 인식은 일대일로 연결되는가?

불교의 무아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자아의 해체 단계를 넘어, 몸과 인식이 어떠한 역학으로 연기되는지를 칠식주라는 범주를 통해 정교하게 분류한 지점이다. 그리고 분류는 오늘날 AI라는 전혀 새로운 형식 앞에서 뜻밖의 설명력을 발휘한다.

칠식주는 인식이 머무는 일곱 가지 양태로, 삼계(三界) 아우른다(DN 15). 욕계는 육도 윤회의 중생(1), 색계는 범중천(2), 광음천(3), 변정천(4), 그리고 무색계는 수행의 맥락에서 알려진 공무변처(5), 식무변처(6), 무소유처(7)이다.

하위의 범주(1~4) 지닌 욕계·색계[18] 중생이며, 이는인식과의 조합 방식에 따라 다시 나뉜다. 몸과 인식이 각각 별개인 존재(種種身 種種想), 몸은 별개이지만 인식은 하나인 존재(種種身 一想), 몸은 하나이지만 인식이 별개인 존재(一身 種種想), 하나에 인식도 하나인 존재(一身 一想) 가지이다.

범주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몸의 개념은 각각의 전통이나 학계의 분류 방식에 따라 다양한 범주로 정의되는데, 여기에서는 전통 분과 간의 정의가 갈라지는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몸과 인식이 각각 별개인 번째 범주는 일반적으로 수용되므로 제외하고, 번째와 번째 범주를 살펴본다.

번째 범주, 몸은 여럿이지만 인식은 하나인 형태를 생각해보자. 클라우드 기반의 AI 동일한 하나의 모델이 수백만 사용자와 상호작용한다. 앞서 살펴본 아스펜 숲도 마찬가지이다. 유전자 관점에서 개별 유기체는, 정보체계인 DNA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한 여러 하나에 불과하다고도 있다.[19]

물론 이러한 비교가 엄밀한 등치는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모두 다르게 생명을 정의하고,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형태의 지능을 고찰하는 상황에서, 몸과 인식의 조합이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다양할 있다는 가능성을 현대의 언어로 다시 환기시키려는 시도이다.

결국 몸과 인식의 정의에 따라 의식에 대한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근 의식 연구의 중심축이 뇌에서 신경계 전반으로 이동하고, 나아가 동물의 경계를 넘어 식물이나 미생물의 신경 체계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흐름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있다.[20]

번째 범주, 몸은 하나이지만 인식이 여럿인 사례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고찰할 있다. 문어 다리에는 뇌보다 많은 뉴런이 분산되어 있고, 다리는 독립적으로 감각하고 반응한다.[21] 다리는 몸에서 잘린 후에도 기초적인 동작을 수행한다. 하나의 안에 인식의 중심이 여럿인 셈이다. 해리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있다.[22]

디지털 세상에는 이와 같은 사례가 흔하다. 사람이 여러 계정의 이메일이나 드라이브를 가질 수도 있고, 하나의 스마트폰에 별도의 유심을 장착해 다른 주체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스마트폰이 신분증, 사회적 자아의 역할을 하는 한국 사회에서 몸과 분리된 디지털 주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경전의 분류와 일치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칠식주는 수행론의 맥락과 존재론의 층위를 함께 담고 있어, 이들 사례와의 단순한 등치에는 무리가 따른다. 다만 몸과 인식의 조합이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다양할 있다는 가능성을 고대의 분류가 이미 열어두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온: 자아를 해체하는 다섯 묶음

칠식주가 몸과 인식의 결합 방식을 분류한다면, 오온은라는 주체의 감각이 구성되는 역동적인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우리가 실체라고 믿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일시적 결합일 뿐이라고 설한다. 그런데 오온도물질(, rūpa)’ 무엇이라 정의하는지 범위에 따라 해석은 다양하게 갈린다.

글은 앞의 칠식주에서 살펴본 색의 정의에 따라보이지 않는 차원의 으로 물질을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에서, 생명의 정의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연구자들처럼 정보이론 관점을 통해 오온의 재해석을 시도한다.[23]

이는 오온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 흐름이라는 점에서 현대 정보이론의 구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은 계산적 환원이 아니라, 주체적 경험이 구축되는인식의 문법탐구에 있다. 마음의 작용을 기계적 연산으로 온전히 치환할 수는 없지만, 인지 과정을정보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메타포로 재구성해 다음의 모델링을 시도한다.

이때 () 가공 신호가 만나는 인터페이스[24], () 신호에 대해내부시스템이 즉각 반응하는 가치 평가, () 유입된 정보의 패턴을 읽어내어 명칭을 부여하는 표상 시스템, () 표상을 바탕으로 형성력, 그리고 () 이러한 맥락 속의 현재 상태를 분별하는 과정에 해당한다고 있다. 오온은 정보를 처리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자아를 구축하는과정이다.[25]

다섯 과정 가운데 고정된 어디에도 없다. 오온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찰나마다 생멸하는 흐름이며, 흐름의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중첩이 라는 가상 주체의 통제된 환각을 빚어낸다. 오온 분석이 겨냥하는 핵심, 다섯 과정 어디에도 그것을 운영하는 고정된 주체가 없다는 통찰은, 현대 신경과학이 자아의 실체를 찾는 과정에서 도달한 결론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연기: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은 흐름의 상속

자아가 구성된 것이라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가 다른가? 질문에 불교 전통은 명쾌하면서도 역설적인 답을 내놓는다.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묻는다. 죽은 다시 태어나는 자는 이전의 사람과 동일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존자의 답은 단호하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소(na ca so, na ca añño. Miln. 40)”. 이어지는 어린 시절의 왕과 지금의 비유는, 주체를 강이나 불꽃과 비교할 선명해진다. 우리는 순간 다른 물이 흐르는 강을 같은 강으로 부르고, 순간 다른 연료를 태우는 불꽃을 같은 불로 부른다.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연기는 흐름의 구조를 설명한다. “이것이 있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SN 12.21)”. 자아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들이 서로 의존하여 성립하는 과정이다. 조건이 모이면 나타나고, 조건이 흩어지면 사라진다. 여기에 고정된 중심은 없다.

칠식주는 몸과 인식의 조합이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유연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오온은라고 부르는 것을 다섯 과정의 임시 묶음으로 제시하며, 연기의 법칙은 묶음이 흐름일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경전의 흔적들은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자아는 구성되며 구성된 것은 해체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무아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4.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다 - 표상이라는 뗏목

실마리는 표상(表象) 있다. 모든 인식 체계는 효율을 위해 복잡성을 압축한다. 쏟아지는 감각 데이터를 매번 처음부터 처리할 없기에 뇌는 반복되는 패턴을 범주로 묶고 개념으로 고정한다. 압축이 없으면 우리는 혼돈 속에서 것이다.[26]

그런데 압축에는 대가가 따른다. 한번 굳어진 표상은 새로운 정보를 압축된 범주 안으로 흡수하려 한다. 낯선 것도 익숙한 범주로 해석하고, 맞지 않는 것은 노이즈로 걸러낸다. 표상이 정교해질수록 고착도 깊어진다. ‘라는 표상도 마찬가지이다. 뇌가 감각 데이터를 나라는 일관된 표상으로 압축하는 순간, 이는 실체로 굳어진다. 인지 체계가 효율을 위해 구축한 표상이 거꾸로 인식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의 표상 아주 강력한 표상이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기억하고, 설명한다. 그런데 언어는 구조적으로 행위자를 전제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행위와 행위자를 분리하고, 행위자를 실체화하는 문법 안으로 들어선다. 자아를 만든 것이 언어는 아니지만, 실체처럼 강화하는 것은 언어이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경계하도록 불교에서는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물론 언어를 통한 붓다의 가르침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뗏목이며, 뗏목은 강을 건너는 동안에는 없어서는 생존의 도구이다. 그러나 강을 건넌 뒤는 내려놓아야 대상이 된다(MN22). 세계를 이해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에 언어만큼 강력한 도구는 드물지만, 바로 강력함 때문에 뗏목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중생의 근기에 맞춰 여러 뗏목을 제시하던 붓다가 뗏목을 버린, 침묵을 선택한 순간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질문들의 공통적인 전제 -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주체, 언어 개념을 통한 범주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에 대한 임의적인 분별 - 중단을 요구한다.[27]  침묵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이를 인식론적 장치로 무아 연기의 구조와 충돌하는 전제 자체의 중지로도 읽힌다.

뗏목을 내려놓을 , 우리는 비로소 나아갈 있다. 우파니샤드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neti neti) 선불교의 불립문자(不立文字) 같은 자각에서 나온 방편이다. 그러나 뗏목을 완전히 내려놓을 있는 이는 드물다. 우리는 대부분 뗏목을 놓지 못한다.

그렇다면 뗏목을 내려놓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우리가무아책임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있을까?

 

5. 업의 주체는 없어도 업보는 있다 - 무아와 책임의 문제

자아가 구성된 것이라는 통찰이, 그러니 책임도 없다는 결론으로 흘러서는 된다. 이것은 무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위험한 오독이다. AI 내린 결정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을 , 행위의 고정된 주체가 없으니 책임도 없다고 말할 있는가? 불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브라만이 붓다에게 묻는다. “업을 짓는 자와 결과를 겪는 자가 같은 사람입니까?” 만약 같다면 고정된 자아를 전제하는 것이고, 다르다면 책임의 근거가 사라진다. 붓다는 극단이라 답하고, 양극단을 넘어선 연기법을 설한다(SN 12.46). 고정된 행위자가 없더라도 업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의도와 행위는 조건이 되어, 연기의 그물망 안에서 결과로 이어진다.

불교에서 (, kamma) 핵심은 바로 의도(cetanā)이다(AN 6.63).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를 추동한 의도가 업을 형성한다. 원리는 AI 맥락에서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드러낸다. AI 시스템이 내린 결정일지라도, 시스템에 관여한 인간의 의도는 이미 인과의 흐름 속에 있다. 개발자가 어떤 목적으로 시스템을 설계했는지, 어떤 방향의 데이터를 축적했는지, 사용자가 그것을 어떤 의도로 작동시켰는지 , 의도는 행위자의 실체 여부와 무관하게 인과의 사슬을 형성한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강물에 돌을 던진 사람이 물결이 어디까지, 어떻게 퍼질지 미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도와 행위는 물결의 원인으로 이미 작용하고 있다. AI 자율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돌로 인한 물결이 강력한 물결을 만들게 된다는 뜻이다. 물결은 더욱 멀리 퍼지고, 처음 돌을 던진 의도와 힘은 물결 속에 살아있다.

이렇듯 자아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연기의 그물망 안에서 AI 힘을 통해 이루어진 일의 과보는 넓고, 깊어진다.

 

6. 공이 허무가 되지 않으려면 - AI 시대의 윤리

무아와 () 대한 가장 흔하고 잘못된 해석은아무것도 없다 방향의 해석이다. 자아는 구성된 것이라 경계가 유동적이고, 언어조차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고 보면, 자칫 모든 것이 공이므로 중요한 것도 없다는 방향으로 이해될 있다. 어차피 책임의 주체도 고정된 것이 아니니 AI에게 맡겨도 된다거나, 문제가 발생해도 AI 책임이라는 식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마치 무아를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논리는 오히려 방일(放逸, pamāda) 가깝다.[28]

공은없음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음 의미한다. 이는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고, 이렇게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조건을어떻게만드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벽돌은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건물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누군가의도 의한 결과이다. 공성은 책임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 행위의 무게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피부라는 경계 안의 자아에서 벗어날 비로소 넓은 연기의 그물망이 보인다. 나와 AI 사이의 경계에 초점을 맞출수록 망은 흐릿하게 보이고, 경계에 대한 초점에서 멀어질수록 망은 또렷하게 보인다.

불방일과 사회적 깨어 있음

맥락에서 불교의 불방일(不放逸, appamāda)이라는 덕목이 새롭게 읽힌다. 이는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의미로 흔히 해석되지만, 어원적으로는 정신이 취하지 않고 맑은, 마음이 선한 방향에 머물도록 쉬지 않고 지켜내는 적극적인깨어 있음이다.[29]  덕목은 AI 시대의 기술 제어 문제에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시스템의 기저에 놓인 의도가 공정하고 이타적인지를 끝없이 성찰하는 과정, 그것이 불방일, 깨어 있음 사회적인 형태이다.

AI처럼 확장성이 높은 시스템의 경우, 자율성이 높아질수록 깨어 있음이 더욱 절실해지는 시점은 바로 의도가 주입되는 단계, 설계와 사용 각각의 선택 단계에서이다. 물결이 일어난 이후에는 바로잡기가 쉽지 않으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계의 단계이며, 사용자라면 설계를 고르는 시점에서의 신중함, 그리고 사용 AI에게 전권을 넘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 주체와 단계별로 각각 AI 제어(AI harnessing) 필요하다. 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공성의 이해가 아니라 방기(放棄)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주체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방향을 바르게 잡으려는 깨어 있음이 필요하다. 고정된 자아는 없어도 의도는 남고, 실체는 없어도 결과는 온다.

 

7. 나가며

글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다. 글을 것은 누구인가? 질문은 AI 관여한 창작물의 저작권 또는 AI 인해 놓치는 일자리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파고들수록 훨씬 오래된 질문으로 이어졌다. ‘주체 무엇인가? ‘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가?

과학은 자아의 실체를 찾는 길에서 그것이 구성되는 과정을 발견했다. 생명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유동적이었고, 감각은 세계를있는 그대로전달하는 창문이 아니라능동적으로구성하는 장치였으며, 뇌는 순간라는 일관된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불교는 오래 전부터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몸과 인식의 조합이 상식보다 훨씬 유연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칠식주, ‘ 다섯 과정의 임시적 묶음으로 분석한 오온, 묶음이 실체가 아닌 흐름일 뿐임을 드러내는 연기도 있었다. 그리고 언어는 구성을 실체처럼 강화하는 강력한 표상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통찰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분명한 자아가 없으니 책임도 없다는 방향은 아니다. 불교의 답은 정반대이다. 고정된 자아가 있다면 책임은 자아의 경계 안에서 끝난다. 그러나 자아가 조건들의 그물망이라면, ‘ 만든 조건은 경계 없이 전체로 퍼져 나간다. 고정된 울타리가 없는 만큼 물결은 멀리 퍼진다.

피부라는 막을 경계로 몸이라는 범주 안에 자아가 고착된다. 경계가 아닌 연결된 관계에 초점을 맞출 , 연기의 그물망이 보인다. 행위자는 없어도 행위는 있고, 실체는 없어도 결과는 생긴다. 개발자의 의도, 시스템의 설계, 사용자의 선택 - 모든 것이 연기의 그물망 안에서 조건을 만들고 결과를 낳는다. 자아가 없다는 통찰은 책임의 소멸이 아니라, ‘라는 좁은 틀을 넘어선 확장된 연기적 책임의 시작이다.

AI 시대는 통찰이 관념에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지는지를 묻는다. 마우스가 홀로 움직이고 알고리즘이 결정을 내리는 지금, 주체성의 회복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을 바르게 잡으려는 깨어 있음이다. 위임을 통해 자아라는 범주의 스펙트럼이 넓고, 빠르게 확장될수록, 처음 심은 의도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다.

글을 것은 누구인가?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러나 불교가 건네는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글을 통해 어떤 조건을 만들고, 어떤 관계를 이어가고, 어떤 방향을 향할 것인가? 빼앗길 주체는 없어도, 지켜야 관계는 남는다.



[1] 심사가 어렵기로 유명한 『네이처(Nature)(2026 3), 가설의 설정부터 실험  및 집필까지 인간의 개입 없이 AI가 완수한 논문이 게재되면서 이러한 논쟁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인간은 AI의 설계 및 검증 주체로만 참여했다(https://sakana.ai/ai-scientist). 인간의 의도와 알고리즘의 실행 사이의 간극은 더욱 좁아지고 있으며, 이는 법적·윤리적 책임 소재의 경계를 뒤흔들고 있다.

[2] 에이전트의 주체적 결정으로 보이는 것은 개발자가 설정한 정밀도 목표치(precision target)와 신뢰도 임계치(confidence threshold)라는 수치적 통제 내 계산 결과로, 모델·메모리·외부 도구·정책 제약이 결합된 분산 시스템에 가깝다. 기술적 조합이 만들어내는 행위의 효과에 의인화가 더해진다.(Anthropic, Measuring Agent Autonomy; OpenAI, Agentic Governance Cookbook; Undark, Opinion: AI Agents and Ethics 참조).

[3] 이는 빙의(憑依)에도 비유할 수 있다. 신비주의적 주장이 아니라, 주체성의 위임이라는 보이지 않는 역학을 시각화하려는 것이다. 내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문장을 구성하는 의지는 점차 외부로 이전된다.

[4] Frances Westall and André Brack, “The Importance of Water for Life” (2018), p.3. DOI: 10.1007/s11214-018-0476-7.

[5] Albert Szent-Gyrgyi, The Nature of Life, 1948, p.9,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2007, p.134), Francis Crick, “On Protein Synthesis”(1958), p.153.

[6] 칼 짐머, 『생명의 경계』(2022), p.290-292.

[7] D. T. 맥스, 『프리온』(2022), p.192-201.

[8] 수잔 시마드,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2023), p.377, 385.

[9] 로버트 헤이즌, 『제너시스』(2008), p.41-53.

[10] 물질적 실재(it)가 정보(bit)로부터 도출된다는 J. A. 휠러(Wheeler)의 사유이다. 그는 모든 물리 존재(every ‘it’)가 근본적으로 정보-이론적 기원을 가지며, 우주는 관찰자의 질문(yes-no questions)에 대한 답변들의 총합이라고 보았다. 이는 측정 행위 자체가 실재를 구성한다는,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와 연결된다.

[11] 니컬러스 험프리, 『센티언스, 의식의 발명』(2023), p.42-43.

[12] 아닐 세스(Anil Seth)현실을 일컬어환각들이 서로 일치하는 상태라고 한다(https://www.ted.com/talks/anil_seth_your_brain_hallucinates_your_conscious_reality 2024 참조). 이는 범부들의전도몽상(顚倒夢想)’에 비유할 수 있다.

[13]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2022), p.231-232.

[14] V. S. 라마찬드란, 『뇌는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2016), p.105-114.

[15] 청각의 경우에도 주파수 대역은 종마다 상이하며, 수용 가능한 정보도 달라진다. 기 레슈차이너, 『감각의 거짓말』(2023), p.135-146.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ll)의 움벨트(Umwelt)나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의 박쥐 비유도 이를 시사한다.

[16] 아닐 아난타스와미,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2017), p.21-33.

[17] 『제네시스』에서 귀도 토넬리(Guido Tonelli)가 양자역학의 반직관적 세계관을 설명하며 사용한 말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묘한 법칙의 양자역학처럼, 붓다의 가르침을위 없이 깊고 미묘한 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고도 표현한다. 일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통찰을 담는다는 전제에서 이 비유를 선택했다.

[18] 색계(色界, rūpadhātu)의 色, 루파(rūpa)는 모양·색상을 지닌 것을 의미하여, ‘변한다고 해서 色(ruppatīti rūpaṃ)’이라 정의한다(SN 22:79). 주석서는 이를 차가움·뜨거움 등의 대립 조건에 의해 부서지고 흩어지는(rūpana·viddhaṃsana) 역동적 성질로 해설한다(cf. Vism. XIV.34). 色은 오온의 첫 번째 요소로서 경험 주체의 물질적 형상 및 경험되는 대상인 물질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칠식주 구분에서 色이 없는 무색계(無色界, ārūpadhātu)는 몸이 없는 인식(saññā)의 상태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루파(ārūpa)가 아닌 루파(rūpa)는 물질인 몸(kāya)에 대응한다.

[19] 『벌레의 마음』(2017, p.249)에서 이대한 등은 생명으로 간주되던 몸을 차에 비유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생식세포(germline)’라는 승객을 목적지에 도착시키고 폐기되는 일회용 택배 차량이다. 이 관점에서 죽음은 생명이 당하는 수동적 패배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유전자의 스위치를 끄고 켜는 능동적 조절로 표현된다.

[20] 뇌 중심에서 벗어나는 의식 연구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다마지오, 『느낌의 진화』(2019), 피터 고프리스미스, 『아더 마인즈』(2019)를 참조. 스테파노 만쿠소·알레산드라 비올라, 『매혹하는 식물의 뇌』(2016) 및 파코 칼보,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2025)에서도 상세히 다루어진다. 그 밖에 Arthur S. Reber et al., The Sentient Cell: The Cellular Foundations of Consciousness(2023)에서는 신경계가 있는 동물의 의식만 인정하는 관점을 비판한다.

[21] 고프리스미스의 연구(2019, p.102-105)에서 문어는, 하나의 유기체(一身) 내부에 중앙 통제가 아닌 여러 인식의 흐름(種種想)이 공존하며 전체의 생존을 도모하는 사례이다. 칼보 등은 뇌 없이도 수억 개의 뿌리 끝 개별 명령 센터를 통해 정보를 처리하고 학습하는 식물을 예로 든다. 단일 자아에 귀속되지 않는 세포 기반의 다층 인지 프로세스는 아직 논쟁적이지만 점차 인정되는 추세이다. 이는 불교의 연기적 인식론과非뇌중심(non-brain-centric)’ 지능의 담론을 관통하는 철학적인 접점을 형성한다.

[22] 다마지오(2021)는 해리성 정체 장애를 사례로 자아 단일성에 질문을 던진다(p.203).

[23] AI가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개념들에 대해 독립적인 신경 활성 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이 2024년 앤트로픽 연구에서 발견된다(Anthropic, Mapping the Mind of a Large Language Model). AI는 통계적 확률로 다음 단어를 예측하지만, ()과 같은 인지 구조도 갖춘 것이다. 신경과학을 기반으로 한 AI의 작동 방식을 오온의 구조와 대응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24] 색은변형되는 것(ruppati)’, 수는느끼는 것(vedayati)’, 상은인식(식별)하는 것(sañjānāti)’, 행은의도로 형성하는 것(abhisaṅkharonti)’, 식은분별하여 아는 것(vijānāti)’이라는 동사적 정의(SN 22:79)를 참고한 해석이다. 사대(四大)성질’(MN 28)로도 기술되는 색온을, 일반적인 몸에 국한하지 않은 물리적 신호의 성질, 내부처리 이전의 원시 신호 및 이들이 접하는 인터페이스로 간주한다.

[25] 이 구조적 해석의 타당성 확보를 위해서는 향후 인지과학 및 데이터 공학의 관점에서 심층적인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다른 맥락에서 발전한 분야를 비교하는 문제도 있지만, 구조화라는 압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과도한 추상화의 측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26] 자폐 스펙트럼은 이 압축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뇌는 세부 정보를 생략하고 핵심 패턴만 걸러내는 범주화 단계[]를 거치는데, 자폐 성향의 인지 체계는 이를 거치지 못해 가공 없는 세부 감각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한꺼번에 받아들인다. 이로 인한 정보의 과부하가 인지의 혼란과 감각의 괴로움을 초래한다.

[27] Hajeong Park. “The Buddha's Avyākata and AI Pattern Recognition: Two Upāyas for Disclosing the Emptiness of Language”(2026), DOI: 10.21482/jbs.86..202603.235.

[28] 방일인 pamāda는 어근 ‘pā’(마시다·취하다)에서 비롯되어, 정신이 취해 방심한 상태를 의미한다. 부정 접두사가 추가된 appamāda는 반대로 불방일, 맑게 깨어 있는 적극적인 상태이다. 주석서 전통에서 불방일을사띠가 떠나지 않는(sati-avippavāsa, 不離念)’, 즉 늘 깨어 있는 상태로 규정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DhA IV.26).

[29] 이 해석을 현대 AI 시스템의 맥락에서 풀면, 시스템의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축 과정에서 편향이나 오염이 생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태를 점검하고, 선한 의도를 지키는 적극적 자기규제의 윤리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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